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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 뿌리/고대사

유류-한국 고대사에 거대한 비극과 재앙을 잉태한 한 남자(1)

by 역뿌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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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한다.

 

우유부단하지만 때로는 잔혹한 결단을 서슴없이 내렸으며 겁이 많고 나약하지만 수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그의 이름은 유류.

 

고구려의 이대 군주이다.

 

이제는 활자화된 기록으로만 그 자취를 더듬을 수 없는 유류라는 사내는 누구에겐 교과서를 통해 헤어진 여인을 그리워하는 시조를 지은 황조가를 통해 마치 로맨티스트처럼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고대사의 가장 비난받아야할 마땅한 비극과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남자다.

 

 

                                                              *********

 

 

지금으로부터 이천여년전인 서기전 37년.

 

일단의 사내들을 태운 말들이 추격하는 군대를 뿌리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선두의 선 사내의 이름은 주몽.

그는 동부여에서 태자인 대소의 견제와 시기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졸본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 어찌나 급하게 달아났던지 어머니는 물론 임신을 한 자신의 아내인 예씨조차 동부여에 그대로 남기고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졸본에서 그는 뛰어난 무예로 많은 동료들을 얻게되고 마침내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연타취발의 눈에 들어 그의 딸인 미망인 소서노와 혼인을 하게 된다. 혼인 당시 그녀에게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졸분부여의 왕손 우태사이에 태어난 비류와 온조가 있었다.

소서노는 사실상 연타취발의 후계자나 다름없었으며 아무런 기반이 없던 주몽을 졸본의 지배층에게 알리고 또한 재정적 지원을 하며 고구려를 창업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는 후에 비류가 온조에게 탄식을 하며 한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비류가 말하길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리를 피해 이곳으로 몸을 피하셨을 당시, 우리 모친께서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왕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모친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허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로 돌아갔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모친을 모시고 남쪽으로 향해 살 곳을 선택하여 따로이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

 

각설하고 주몽이 졸본에서 고구려를 건국할 즈음, 동부여에 남아있던 모친 유화가 사망하게 되고 주몽의 전처인 예씨와 그녀가 낳은 아들 유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유화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지켜만 보고 있던 대소의 위협이 노골적으로 바뀐 것이다.  

 

마침내 예씨와 유류는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의 고구려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는 아마도 주몽의 명을 받은 군사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어쨌든 그들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피신하자 국론은 곧 둘로 분열하고 만다.

주몽을 따라 동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신진 세력들은 적장자인 유류를 태자로 세워야한다고 한다고 강변했으며 소서노를 위시하여 졸본의 토착 세력들은 고구려를 창업하는데 실질적 공이 있는 소서노의 아들 비류가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나라를 세우자마자 둘로 분열된 초유의 사태에 주몽은 어떤 역활을 했을까?

혈혈단신으로 낯선 땅에서 뛰어난 무예와 리더쉽으로 나라를 창건한 그였지만 혈육의 문제만큼은 쉽사리 어찌하지 못했던 듯 하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은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다가 세상의 일이 허망함을 느꼈는데 이를 알아차린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해 갔다. 이에 왕은 졸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머리를 밟고 승천했다.

 

고대의 기록은 비교적 가까운 조선시대의 기록과는 달리 사료가 부족할 뿐 아니라 은유로 가득차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주몽이 권력의 다툼에 지쳐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듯한 뉘앙스를 준다. 마치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배가 다른 아들들간의 권력 다툼인 왕자의 난으로 인해 함양으로 잠적하듯 말이다. 하지만 황룡의 머리를 밟고 승천했다는 것은 단순히 속세를 떠나 잠적했다는 것인지 사망했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심적인 고뇌가 깊어져 병이 되어 주몽이 몸져눕게 되고 왕의 부재를 틈타 양 세력간의 다툼이 치열해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군사적 충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서노가 비류, 온조를 비롯하여 일단의 귀족 무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한 것을 보면 서로 극단으로까지는 치닫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이 불화와 앙금은 하나의 나라를 고구려와 백제로 둘로 갈라  향후  600여년동안 짧은 기간 정치적인 동맹을 제외하고는 구원의 원수로 서로 피를 흘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유류는 그저 모친과 함께 죽음을 피해 부친인 주몽에게로 달아난 것 뿐인데 그 사실만으로 그를 고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과 불행을 낳은 원흉으로 지목하기에는 너무하지 않냐고 말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유류는 마땅히 역사와 민족적인 차원에서 지탄받아 마땅한 자이다.

 

말 그대로 유류가 고구려로 피신한 것이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해도 왕이 된 이후로 그가 보인 행보는 그야말로 결코 용납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2부에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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