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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 뿌리/고대사

유류-한국 고대사에 거대한 비극과 재앙을 잉태한 한 남자(2)

by 역뿌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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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류는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정치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주몽에 의해 병합된 비류국의 왕 송양의 딸을 자신의 왕후로 맞아들인다. 이외에도 여러 혼인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해 나갔으나 유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던듯 하다.

동부여에서 항상 죽음과 불안에 시달렸던 그는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라는 사실을 백성들과 반대 세력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유류는 당시 고구려의 변방을 침략해 약탈을 일삼던 선비족을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명장인 부분노에게 대군을 이끌게 한다. 부분노는 선대왕 주몽시절에 해인국을 정벌하는 등 초기 영토확장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의 활약으로 선비족이 무릎꿇자 유류의 지위는 차츰 안정되게 된다.

국내에서의 지위가 안정되자 다시금 고개를 쳐든 것은 나라밖의 오랜 우환이었다.

유류는 어린 시절부터 동부여의 왕 대소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것이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아마 그는 평생 불안에 시달렸던듯 하다. 열등감에 시달리고 심약한 사람일수록 그에 대한 반동심리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유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때마침 동부여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하여 군주인 대소는 유류왕에게 서기전 6년에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대소를 평생 두려워한 유류왕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제안이었으나 다음 왕위를 이을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는 말에 탁리와 사비등의 신하들은 물론 당사자인 도절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왕위를 이을 태자를 적국에 인질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나 유류왕은 이에 대해 앙심을 품는다. 하여 몇년 뒤 하늘에 지낼 제사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였다하여 탁리와 사비를 구덩이 속에 던져 죽이고 그 이듬해에는 태자 도절까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자의 이름이 도절都切(도읍을 끊었다)이라는 것인데 그가 태어났을때 이름을 이렇게 흉하게 지었을리는 만무하고 아마 유류왕에 의해 이런 모욕적인 호칭으로 불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12살 시절 부여에 인질로 가라는 명도 거절하고 6년뒤 청년이 되어서는 동부여 대소왕의 위협을 피해 유류왕이 천도를 하려는 것을 막은 것에 대한 분풀이를 당한 것이 아닐까 한다.

중신들을 잇따라 처형하고 태자까지 죽게하고 나서야 유류왕은 드디어 염원하던 위나암으로의 천도에 성공하게 된다. 동부여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지고 아직까지도 남아있던 졸본부여의 옛 토착 세력들(소서노의 죽음으로 인해 더 반감이 커진)의 영향력으로부터도 한결 자유로워 진 것이다.

하지만 밖으로 적극적으로 팽창해야할 신생국가 고구려가 불과 수십년만에 수도를 안쪽으로 옮기자 국력은 조금씩 쇠퇴해갔다.

하지만 이때부터 오히려 유류왕은 점차 정사를 게을리하고 사냥과 여색에 열중한다. 비첩들이 서로 투기를 일삼아 서로 다투어 한명이 달아나기까지하니 이때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황조가이다. 또한 자신에게 사냥을 멈추고 국정에 힘을 쏟으라고 간언한 고구려의 건국 공신이자 부친 주몽의 친구이기도 협보를 한낱 농원지기로 좌천시켜버리기까지 했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으나 그들을 다잡은 것은 다행히도 다음 왕위를 잇게 될 태자인 해명의 존재였다. 그는 형인 도절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민심을 안정시키기위해 옛 도읍인 졸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조선의 멸망이후로 수많은 열국들이 생겨났는데 고구려 주위에도 신생국가를 견제하는 나라들이 많았다. 그중에 하나가 황룡국이었다. 황룡국왕은 고구려가 수도를 옮긴 것을 알게되자 버려지다시피한 졸본땅에 욕심이 났는지 태자인 해명을 시험해 보기위해 한사람이 들기도 힘든 활을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해명은 혼자서는 들기도 힘든 활을 힘껏 잡아당겨 꺽어버리니 해명의 나이 스무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해명의 됨됨이를 파악해보려는 얄팍한 의도를 보기좋게 꺾어버린 일이었으나 유류왕은 오히려 이 일에 대해 황룡국왕에게 자신의 아들인 해명을 죽여줄 것을 사주하게 된다.

그 자신이 배다른 형제들과의 다툼을 통해 부친인 주몽을 밀어내다시피하고 왕위에 오른 유류였기에 옛 도읍에 자리한 채 백성들과 토착 세력들의 지지를 받는 아들 해명을 잠재적인 적수로 인식하고 있었던 듯 하다.

이때 삼남인 무휼(후에 고구려 삼대군주인 대무신왕)은 대여섯살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 해명이 죽는다면 고구려는 왕위 문제로 급격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으나 유류는 자신의 안위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다면 혈육이라도 가차없이 죽이고 나라의 안위도 내팽겨치는 인물이었다.

황룡국왕은 이에 호응해 해명을 죽이려 했으나 그의 기개에 오히려 탄복을 하고 유류왕의 청을 거절하게 된다. 하지만 유류는 자신의 정신 분열적인 의심과 불안증으로 인해 끝끝내 해명을 죽음으로 몰고가기위해 칼을 보내어 자결을 명한다.

해명은 나라를 지키기위한 자신의 행동이 결국 부친인 유류왕의 시기와 의심으로 나라를 두조각 낼 수 있음을 깨닫고 순순히 자결을 받아들여 들판에 창을 꽂고 몸을 던지니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그 들판을 '창원'이라 부르게 된다.

유류가 스스로 불러낸 불행으로 인해 고구려가 급격히 흔들리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동부여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굴복시키려 들고 그저 자신의 보신만을 생각한 유류왕은 순순히 이를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당시 여섯살에 불과했던 태자이자 삼남인 무휼이 이 난국을 헤쳐나가니 이는 다음에 다시 밝히고자 한다.

여태껏 살펴본 바대로 유류는 고구려를 백제로 갈라지게 만들어 수백년간 피로 물드는 전쟁을 하게 만는 원흉이었으며 고구려를 불과 수십여년만에 멸망으로까지 몰고 가게 만들었던 암군이었다. 그의 치세하에 대외적인 영토 팽창은 건국시조였던 주몽의 측근 공신들에 의한 것이기에 그가 남긴 유일한 업적은 도절로부터 해명, 무휼로 이어지는 자식들이 하나같이 보기 드물게 뛰어난 군주 재질이었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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