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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뿌개기-역사 오분 순삭

강태공과 강감찬 일화-그대, 나이 들었음을 서러워 말라.

by 역뿌 202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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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들 허송세월을 보내며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을 가리켜 강태공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이런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역사 속에서 강태공은 일흔을 헤아리는 세월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주무왕을 도와 천하통일이라는 불후의 공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 덕분으로 제나라의 시조에까지 봉해졌지요.

 

강태공은 일생에 걸쳐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당시 은나라는 주왕의 폭정으로 인해 많은 지사들과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매일같이 죽임을 당하고 권력과 잇속에 재빠른 간신들만이 왕의 주위에서 출세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변방에서는 조금씩 혁명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강태공은 주왕은 물론 이런 변방에서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에게도 함부로 출사出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기운이 완전히 무르익고 그 와중에 각 세력을 이끄는 인물들 가운데 옥석玉石, 즉 우열이 가려지기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강태공의 아내는 범인凡人(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뒷바라지에 지쳐 결국 달아나고야 맙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위수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웠습니다. 강태공 역시 사람이었기에 아마도 낚시는 그에게 명상과 같이 심란한 마음을 다잡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강태공은 주왕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킨 서백 창, 후에 주나라의 시조 무왕에 의해 눈에 띄어 등용이 됩니다. 사서에서는 극적인 만남을 연출하기 위해 서로 우연히 마주치고 됨됨이에 이끌려 군신관계를 맺은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명성과 학문을 익히 알고 암묵적으로 회동을 가졌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죠.

 

 

당시 주왕의 악행은 극에 달해 왕비인 달기와 함께 매일같이 남녀를 벌거벗기고 술로 연못을 채우고 나무들에는 고기를 걸어놓아(주지육림酒池肉林)) 광란의 잔치를 즐겼으며 자신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포락지형炮烙之刑에 처하고 간언을 하는 충신의 심장을 가르고 심심 파적으로 노인의 발뒤꿈치를 가르는 등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런 은나라 주왕의 악행에 대해서는 최근 갑골문에서 발견된 새로운 기록 등과 은나라가 동이족의 국가이기에 승자인 주나라에 의해 악의적으로 그려졌다는 반론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목적은 은나라 주왕의 진실된 실체를 파헤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차치하고 글을 더 이어나가겠습니다.

 

옛날부터 그렇게 오래 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여 고희古稀라고 불렸던 일흔의 나이 그리고 강태공. 누구에게는 한참 늦었다 생각되는 생각되는 나이겠지만 이후 강태공은 주무왕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내고 은나라의 군대를 대파하는 공적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은을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새로 들어서자, 이 소식을 들은 강태공의 전처가 돌아와 그에게 자신을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간청했지요. 이때 그는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닥에 쏟은 후 "엎어진 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覆水不反盆)라고 했다 합니다. 그녀로서는 몇십 년을 고생하고는 단 몇 년을 더 참지 못해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한 셈입니다.

 

강태공 일화는 익히들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테니 또 다른 인물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나긴 역사 중 삼대 대첩이라 하면 조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공전절후空前絶後한 전공을 세운 주인공인 강감찬 장군의 당시 나이는 일흔이 넘은, 현시대로 봐도 매우 고령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감찬 장군은 상당히 늦은 나이인 36세에 관직에 처음 진출했다 합니다. 고려사의 자료가 빈약한 탓도 있겠지만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음에도 거란과의 전쟁에 나서기까지 약 30여 년 동안 그는 역사서에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 고려의 목종에서 현종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문란한 천추태후의 섭정으로 인한 혼란과 강조의 반란으로 인한 목종의 사망 등으로 파국破局에 파국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정쟁 속에서 강감찬은 한직閑職에서 오랜 세월 동안 부침浮沈을 겪었을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는 목종을 뒤이은 현종이라는 젊고 현명한 군주에 의해 늦은 나이에 중용이 되고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 앞에 일흔의 나이로 마침내 총사령관으로 나서게 됩니다.

 

전격적으로 발탁된 노장 강감찬은 당시 대국이었던 송나라조차 무릎 꿇렸던 거란 수십만 대군의 침공을 귀주에서 물리치며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송, 거란의 요나라, 고려의 삼국으로 정립시키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까지도 영원히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노년에 맺은 결실은 비단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시대에 가장 뛰어난 투자가이자 세계적인 갑부로 다섯 손가락 안에 항상 꼽히는 워런 버핏은 재산 중 70%에 해당하는 700억달러는 60대 중반 이후의 투자를 통해 축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또한 "십 년을 보유하지 않을 주식이라면 단 십분도 투자하지 마라."라는 격언을 남기며 긴 안목과 세월로 투자에 나설 것을 조언했습니다.

 

 
우리에게 흔히 켄터키 할아버지라고 알려진 미국의 유명 패스트푸드 KFC의 창업주인 샌더스도 젊은 시절부터 승승장구해서 전 세계에까지 알려진 유명 음식 체인점을 창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계부로부터 모진 괴롭힘을 당했고 젊은 시절부터는 사업이 번번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
창업한 식당에 화재가 나서 수중에는 트럭 한대밖에 남지 않았었습니다. 그때 샌더스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늙은 나이에도 트럭에 요리도구를 싣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요리 비법을 팔려고 시도했으며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사업가 피트하먼과 손을 잡고 수천 개의 체인점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간 KFC를 창업할 수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위와 같은 역사적 인물, 또는 동시대의 위인들을 통해 어떠한 것을 느끼셨나요?

 

우리는 흔히 성공이란 젊은 시기에 이뤄야 하는 것이며 노년에는 그를 바탕으로 휴식과 안정을 누려야 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해서 때로는 공격적으로 또는 조급하게 계획을 세우거나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맛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 일화에서 보듯 성공이란 나이에 좌우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일의 성패에는 그에 걸맞은 때가 있으며 그 시기 또한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결실은 더욱 큰 열매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이상 '역사의 뿌리'였습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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